[기고] 독도 수호의 길, 왜 이사부와 수토인가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이사부 출항지 삼척, 독도영유권 역사적 권원으로
이사부 우산국 복속 '독도영유권 원천'
삼국사기 기록 등 역사적 사실 뒷받침
울릉도 보호 공도정책, 영토문제 화근
삼척, 무릉등처안무사 등 수토관 파견
조선-일본 울릉도쟁계로 '도해금지령'
삼척영장·월송포만호 등 파견 '수토'
삼척 '이사부독도기념관' 구심점 부각
동해왕 역사문화축제 독도수호 메카로
▲손승철 한국이사부학회 회장·강원대 명예교수
△ 신라장군 이사부, 우산국을 복속시키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13년(서기 512년)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도모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켜 신라 영토에 편입시킨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우산국은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울릉도 독도는 역사적으로 이미 6세기 초부터 우리의 영토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사부의 우산국복속을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권리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보다 천년이상이나 지난 1618년에 도토리번의 요나고 주민이 막부로부터 받은 '울릉도 도해면허'를 근거로 일본은 이때부터 울릉도로 가기 위해 독도를 중간 경유지 또는 강치나 전복을 잡기위한 어장으로 이용했으며, 이런 까닭으로 17세기 중엽에 독도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울릉도 도해면허'도 1698년 안용복의 피랍사건 이후 '울릉도쟁계'에 의해 '울릉도 도해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일본은 이미 독도가 조선땅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셈이다.

이렇듯 역사 사실로 증명된 독도영유권이 영토문제에 휘말리게 된 것은 고려말부터 왜구가 울릉도를 동해안 침탈의 거점으로 이용하자, 1403년 울릉도 주민의 보호를 위해 전부 육지로 철수시키고 빈 섬으로 만든 것이 화근이 되었다. 빈 섬으로 만들면 먹을 것이 없으니, 왜구가 약탈할 것이 없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위 공도정책이었다. 그러나 섬을 비웠다고 해서 섬을 포기한 것이 아니고, 이후 삼척에서는 '무릉등처 안무사'나 '삼척영장'들을 수토관으로 파견했다. 수토란 몰래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나 왜인들이 있는지를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의미이다.
 
▲ 이사부 장군 국가 표준 영정
 
△ 무릉등처안무사, 삼척사람 김인우

'무릉등처안무사'의 파견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왜구 방지를 위한 울릉도 주민의 보호 차원이고 또 하나는 무릉등처의 의미이다. 울릉도만을 대상으로 했다면 등처라는 용어를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울릉도와 주변의 섬과 독도 등을 염두에 두고 붙인 호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무릉등처안무사 김인우는 1416년부터 3차례 울릉도에 파견되었다. 김인우는 삼척사람이었고, 남녀 20인을 수색하여 강제로 데려왔다. 1438년에는 다시 '무릉도순심경차관'을 파견하여 울릉도에 숨어 살던 주민들을 잡아서 그 우두머리를 처형하고 무리를 함경도에 나누어 살게 했다. 그 결과 울릉도에의 거주는 물론 왕래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울릉도가 무인도가 되었다. 울릉도에 사람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1883년으로, 1403년 '거민쇄출'이후 480년만이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 주변은 오징어, 꼴두기, 대구, 명태 등 수산물이 풍부했다. 동해안이나 일본 오키섬의 어민들이 포기할 수 없는 황금어장이었다. 결국 1693년 울릉도에서는 고기잡으러 갔던 안용복 일행과 일본 오키섬 어부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안용복이 일본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간에는 '울릉도쟁계'가 시작되었다. 재판결과 '울릉도가 조선영토'이므로 향후 일본인들은 울릉도에 가서는 안된다는 '도해금지령'이 내려졌다.

한편 조선에서는 삼척첨사 장한상으로 하여금 울릉도에 가서 섬의 형편을 살펴보도록 했다.

울릉도에서 돌아온 장한상은 육지에서 몰래 들어가 사는 사람이나 왜인의 불법어로를 경계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수토할 것을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삼척영장과 월송포만호를 교대로 파견하여 1894년까지 200년간 수토를 했다.

당시 동해안에는 고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6곳에 수군 만호진을 설치했는데, 규모상으로 삼척이 가장 컸다. 삼척에는 첨사나 영장을 두어 나머지 지역의 만호를 지휘하도록 했다.

△ 삼척이 독도 수호의 구심점이며 메카이다

울릉도 수토를 실시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울진 대풍헌에 소장된 『수토절목』과 현판을 통해 월송포 주민과 월송만호, 평해군수등의 비용부담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었는데, 최근에 동해시 송정동 강릉김씨 감찰공파 김자현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항길고택일기』가 고 배재홍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고, 이번에 동북아역사재단 이원택 연구위원에 의해 심도있게 소개되므로, 삼척 주민의 부담 내용은 물론 삼척 후망수직군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 진상이 밝혀지는 만큼 기대가 크다.

삼척은 이사부 출항지로서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권원'이며, 삼척영장과 지역민들은 수토를 통해 영토수호를 지속해 왔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삼척이 독도 수호의 구심점이 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이유에서 삼척에 '이사부독도기념관'을 짓는 것이다. 아무쪼록 삼척 동해왕 역사문화축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삼척이 독도수호의 구심점이며 메카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