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⑮ 신이 내린 슈터 이충희

최고관리자1 0 9 2022.04.22 21:02
더 이상의 수식어는 없다. 한국에서는 ‘슛도사’, 대만에서는 ‘신사수’. 슛에 있어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듣는 이충희(50)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천부적 재능이 아닌 땀으로 전설을 이뤄낸 이 시대 만인의 연인이자 진정한 스타였다.

 



Q. 농구를 하기 위해 인천으로 오신 건가요?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는데, 그때는 단지 도시로 나오자는 생각이었어요. 어머니가 인천에 연고가 있었죠. 제가 4살 때였기 때문에 농구를 시킬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우리 집안에 운동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요.

Q. 농구명문 송도중학교를 들어간 것도 농구 때문이 아니었나요?

일반 학생으로 들어갔죠. 그런데 우연하게 농구를 하게 된 거죠. 제가 부산으로 갔다면 부산에서 농구를 했을 테고, 축구부나 야구부가 있었다면 다른 스포츠를 하게 됐을 수도 있죠. 아무 것도 안 했거나.

Q. 농구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농구는 중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할 때 특별활동으로 시작했어요. 마침 운동부가 있었거든요. 핸드볼부도 잠깐 있었고, 유도부는 명문이었죠. 어린 마음에 공을 갖고 하는 농구가 재밌어 보였어요. 조금씩 하다 보니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운동으로 성공을 한다거나 국가대표가 되겠다던가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죠. 단지 좋아서 하게 됐어요.

 

Q. 키가 작다는 이유로 그만두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던데….

키가 작다보니 큰 선수들한테 밀리더라고요. 게다가 처음이었으니까 소질이 없는 게 당연했죠. 당시 할아버지(故 전규삼 옹)가 몇 번이나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때를 쓰고 계속 하겠다고 매달렸죠. 아마 그 때부터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몇 개월 지나니까 곧잘 한다는 소리도 듣고,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 들었죠.

Q. 처음부터 슈터였나요?

신동파 씨가 활약했던 시절에 라디오를 듣고 자랐어요. 농구는 상대 골대에 골을 많이 넣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운반이 아무리 좋아도 골을 넣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골 밑에서 넣는 것이 확률이 높지만, 전 키가 작았죠. 그래서 멀리서 던지기 시작했어요.

Q. 하루에 1천 개의 슛을 던졌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그건 정말 사실이에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할 때 하루에 천 개씩 슛을 던졌어요. 그냥 던진 게 아니라 성공시키는 것만 천 개였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채웠어요. 999개도 용납을 못했어요. 제 기억에 1년이 조금 모자라게 했던 것 같아요.

Q. 하루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해야 가능한가요?

시간으로는 환산이 안돼요. 후배들에게 100개씩 잡아달라고 부탁했죠. 새벽에 350개를 던지면 점심시간 막간을 이용해 250개를 던지고, 저녁에 나머지 400개를 던지는 거죠. 최고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Q. 훈련에 대한 에피소드가 유독 많으세요. ‘살찐 것 같다’는 말 한 마디에 고속도로를 달리셨다는 말도 들었어요.

현대 입사했을 때죠. 하계 신입생들 강릉 훈련 때였을 거예요. 운동이 아니라 신입사원들끼리 어울려 노는 일정이었죠. 4박 5일 내내 저녁마다 술만 먹었으니까 살이 찔 수밖에 없었죠.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방열 감독님이 “너 살 좀 찐 거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농구화 끈 묶고 영동고속도로를 뛰었어요. 몸 관리는 항상 스스로 잘 했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 듣는 게 싫었어요. 어떤 대회를 나가든 근처 공원에 가서라도 컨디션 조절을 따로 할 정도였으니까요. 지나가는 농구 원로들께서도 입버릇처럼 ‘저 놈 참 열심히 하네’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Q. 연습벌레라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개포동 체육관에서 압구정동 숙소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전 후배들을 데리고 매일 뛰어다녔어요. 1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정말 힘들었죠.

Q. 이런 노력 덕분에 신사수, 슛도사라는 수식어를 달게 됐죠?

‘신사수’는 대만에서 붙여준 별명인데, 대만 스포츠 역사상 야구 선수 한 명과 저, 오로지 둘에게만 ‘신(神)’이라는 단어를 붙였죠. 대만만 가면 이상하게 경기를 잘했거든요. 신동파 씨가 필리핀에서 영웅이시라면 전 대만에서 영웅이었어요. 택시를 타건 음식점을 가던 요금을 받지 않았을 정도니까요.

Q. 슛을 던질 때 ‘이건 들어갔구나’라는 느낌이 있나요?

손끝에 느낌이 딱 와요. 슛의 경지에 올랐단 느낌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죠. 그래서 무협지에서 도사들이 경공으로 담을 넘어 다닌다는 것을 믿어요. 제가 경기를 느껴봤으니까요. 슛을 1천 개씩 쏠 때 3~4개월 연습하고 나서 눈을 감았는데, 림이 마치 눈을 뜬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눈 감고도 들어가는 거죠. 그리고 7~8개월 되면 림이 축구 골대처럼 커져 보여요. 잘 들어가는 게 당연한 거죠.

Q. 지금도 현역 선수들에게는 지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감독 시절에 30~40개 던져보고, 선수들과 3점슛 내기를 했죠. 제가 지면 오늘 운동 없다고요. 그러면 애들이 그냥 2시간 운동하고 말겠다고 할 정도였죠. 얼마 전에 방송 녹화 때문에 모비스 체육관을 갔었어요. 김효범 선수(현 G리그 코치)한테 장난으로 ‘슛은 이렇게 쏘는 거야’하면서 3점슛 라인에서 훅 슛을 쐈는데 연속으로 두 번 모두 들어갔어요. 애들이 말을 못하더라고요. 제가 운이 좀 좋아요. 예전에도 동네 꼬마들 농구하고 있으면 공 잡아서 멀리서 대충 휙 던져도 거의 들어갔거든요. 하하. 

Q. 페이드어웨이 슛이 전매특허였어요.

페이드어웨이 슛은 저절로 나온 거예요. 원래는 제가 스텝을 잘 썼어요. 상대 수비를 스텝으로 속이고 들어가서 쐈는데, 잘 들어가다 보니 갈수록 더 큰 사람이 막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텝으로 물러나면서 쏘다 보니까 그런 슛이 나온 겁니다. 따로 연습을 할 수도 없어요. 계속 하다보니까 제 것이 된 거죠.

Q. 슛을 던지고 나서 넘어지는 동작도 많았는데, 체력적인 소모가 많지는 않았나요?

슛을 던지고 넘어졌던 것은 다치지 않기 위해서였어요. 체력 소모는 없었어요. 제가 산을 뛴다거나 하는 장거리 지구력은 정말 약했는데 순발력이 굉장히 좋았죠. 태릉선수촌에서 60m 달리기 측정을 했었는데, 장재근보다 제가 빨랐으니까요.

Q. 농구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나요?

정말 큰 꿈을 갖고 고려대를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전 해에 연세대한테 엄청 깨졌던 거죠. 겨울 합숙을 시작한 후 1년은 정말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기 때문에 선배들이 경기 외적으로 많이 괴롭혔죠. 1, 2학년 때는 정말 많이 맞았어요. 똑같이 맞아도 전 강도가 달랐죠. 도망을 가보기도 했었어요. 아마 그런 부분들이 저를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실력으로 이기자고 독기를 품었으니까요.

Q. 故 전규삼 선생님의 영향도 많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운동 스케줄에 변함이 없었어요. 그만큼 기본기를 굉장히 중점을 두고 가르치셨죠. 그 당시에는 지루하고 싫었는데, 대학을 거치고 실업 팀에 가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기본기가 탄탄하니까 아무리 어려운 동작도 몇 번 해보면 바로 습득할 수 있었거든요.

Q. 고려대에 진학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연세대로 가면 6명을 더 받아주고, 고려대로 가면 1명을 더 받아주기로 되어 있었죠. 그런데 송도고가 연세대보다는 고려대에 연줄이 닿아 있었고, 집안도 고려대 출신이 많아 고려대 진학을 결정하게 됐어요. 송도고 푸른 유니폼이 너무 질려서 고려대 빨간 유니폼이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하하.

Q. 아쉽게 깨진 기록이지만, 고려대 49연승 신화를 이끄셨어요.

기록적인 면에서는 깨졌지만, 그 당시 가치는 아직 깨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중앙대 연승과 차이점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던 실업 팀이 함께 대회를 치렀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직도 자부심은 강하게 남아 있어요.



Q. 라이벌이라고 생각되는 선수가 있었나요? 故 김현준과의 비교가 많이 언급됐는데….

모든 상대가 다 라이벌이었죠. 김현준의 삼성이 기업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관계가 형성된 거죠. 하지만 현준이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정말 이 선수는 좋은 슈터구나’라는 생각만 했어요. 대표팀 처음 왔을 때 제가 슛도 가르쳐주고 그랬으니까요. 현준이는 슛에 기복이 좀 있었어요. 라이벌 의식을 했다면 현준이가 했겠죠.

Q. 현역 말미에 허재라는 걸출한 스타가 등장했잖아요.

허재는 전천후 플레이어였죠. 개인적으로 농구를 정말 잘 한다고 생각해요. 힘이 있는 농구를 했었죠. 허재를 더 돋보이게 해 준 것은 한기범과 김유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허재는 라이벌이라기보다 오히려 저보다 낫다고 봐야죠.

 

Q. 임정명 감독과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현대와 삼성으로 나뉘면서 치열한 경쟁 상대가 되기도 했어요.

포지션이 달라서 매치업은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저희 둘의 비교를 많이 했죠. 임정명은 고려대 입학 당시 고교 랭킹 1위로 들어왔는데, 졸업할 때는 저와 상황이 역전이 돼서 불편한 관계가 된 부분이 있었어요. 경기 끝나고도 항상 매스컴은 제가 탔으니까요. 임정명도 잘 했지만, 주로 궂은일을 했기 때문에 불만이 있었을 겁니다.

Q. 현대와 삼성의 치열한 혈투의 중심에 서 있었는데, 어느 정도였나요?

치열한 정도로 따지면 최고였죠. 당시 연고전 이상이었으니까요. 현대에서 제가 받은 첫 봉급이 38만 원이었는데, 삼성을 이기면 그 날 저녁에 현찰로 100만 원을 줬어요. 기업 라이벌전이니까요.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Q. 현대에서 엄청난 기록을 만들었어요. 최다 득점 기록을 스스로 계속 경신하기도 했고요.

50점대 득점은 계속 하는데, 60점을 못 넘기겠더라고요. 그러다가 1984년도인가? 농구대잔치 1차 결승전에서 허재와 한기범이 있던 중앙대 경기였어요. 1월 1일 경기였죠. 그 때 처음으로 60점을 깼어요. 3점슛도 없을 때였는데 그 뒤로 계속 깨서 69점까지 넣었죠.

Q. 60점 이상을 기록한 날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나요?

동료들이 밀어줘서 찬스가 많이 나는 것일 뿐이죠. 던지면 들어가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희열을 느낀다기보다 몇 개 안 들어갔던 게 더 생각나 아쉬워했어요. 나중에는 더 넣어야지라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Q. 1983년 농구대잔치 출범 이후 국내 최초로 4천 득점을 기록했고, MVP나 득점왕 등 많은 상을 받으셨어요.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그때 만들어진 새로운 상들은 거의 다 제가 처음 받았던 것 같아요. 그 때는 좋았겠지만, 사실 지금은 생각해보면 감회가 남다르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냥 상은 그 때 뿐인 거죠. 제가 잘했다기보다 팀이 잘해서 받은 거니까요. 우승하고 뒤풀이 할 때 동료들에게 꼭 고맙다고 얘기를 했죠.

Q. 삼성과 결승전에서 무기한 출전정지도 당했었어요. 심판을 밀쳐서 비롯된 거였죠.

무기한 출전정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명할게 있어요. 확실한 오심이었죠. 너무너무 화가 났었어요. 농구협회를 찾아가서 우리는 이 경기를 위해 몇 개월 동안 죽어라 훈련하는데 휘슬 때문에 지면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죠. 아마 당돌한 놈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무기한 출전정지가 사실 대회가 없던 기간이라 전혀 상관없었어요. 무기한 출전정지라는 게 당장 다음날이라도 풀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안 풀면 대회 안 나가겠다고 보이콧해서 바로 풀렸죠. 

Q. 대표팀 활약도 대단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신가요?

1984년부터 1987년까지가 제 감각이나 움직임이 가장 좋았던 전성기였어요. 농구에 눈을 떴다고 할까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한 골 차로 중국을 꺾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지만, 패한 경기들이 더 생각나요. 1987년 ABC대회에서 중국을 상대로 연장전에서 패했죠. 우리가 한 골 차로 뒤진 상황에서 20초 정도 남기고 작전을 세웠어요. 허재가 공을 갖고 있다가 제가 탑으로 올라가면 패스를 받아 상대팀에 자유투를 유발시키는 패턴이었죠. 작전대로 돌아갔어요. 제가 상대 선수들을 따돌리고 종료 5초 전에 탑으로 튀어 올라가 패스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허재가 제 앞으로 그냥 휙 지나가는 거예요. 결국 시간에 쫓겨 허재가 던진 슛은 빗나갔고, 제가 뛰어 들어가 리바운드를 잡았지만 이미 경기는 끝나버렸죠. 영웅심리가 발동한 거죠. 경기 끝나고 물었더니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긴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김유택이 자유투 에어볼이 나와서 진 것도 기억나고요. 하하. 

Q. NBA에서도 러브콜이 있었는데,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될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병역 특례가 걸림돌이 됐었습니다.

NBA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제의가 있었어요. 병역 특례가 5년 걸려 있었는데 그 중간쯤이었죠. 그때 협회에서 풀어줬으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겁니다. 세계 대회에서 득점 2위도 했었고, 브라질 상대로 37-45로 전반을 졌는데, 저 혼자 36점 넣고 이문규가 1점을 넣었어요. 그 경기보고 스페인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제의가 들어왔었죠.

 

Q. 은퇴를 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있었나요?

퇴행성 무릎 연골 때문이었죠. 13년 대표팀을 하면서 쉰 적이 거의 없었어요. 대회가 중간중간 계속 있다보니 쉬지를 못하거든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있으면 6개월 전부터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평소보다 운동을 더 많이 했거든요. 13년 동안 계속 그러다 보니 나중에 무릎 연골이 다 나갔더라고요. 대포주사도 맞아 가며 뛰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그래서 은퇴를 결정했죠.

Q. 은퇴 후 대만 홍쿠오팀에서 플레잉코치로 우승을 하기도 했고, 감독도 했습니다.

신기한 거죠. 대만을 갔는데 그렇게 아팠던 무릎이 덜 아픈 거예요. 제가 갔을 때 전반기 6위를 하던 팀이었는데 제가 선수로 뛰면서 팀을 우승 시켰죠. 그 뒤 존스배에서도 미국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어요. 그 대회 득점상도 받았죠. 국내에서는 ‘저거 가짜다’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대만에서는 처음으로 얻은 성적이라 난리가 났었죠.

Q. 현역 선수 중에 가장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선수가 있나요?

잘 모르겠네요. 실력이 모자라서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제 위 선배들이 저보다 농구를 훨씬 더 잘했으니까요. 기량보다는 정말로 운동을 열심히 하는 부분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열심히만 해서는 안돼요. 미쳐서 해야죠. 미쳐서 해도 끝나면 아쉬운데…. 그런 면에서 주희정이나 양동근 같은 스타일의 선수가 저와 닮았었지요.

Q. 현역 시절을 되돌아봤을 때, 이충희에게 농구란 어떤 의미였나요?

농구를 했기 때문에 이충희가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농구를 정말 좋아서 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사인 해달라고 하는 것도 모두 농구를 했기 때문이잖아요. 농구가 아니었으면 제가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득점기록을 새로 쓴 이충희

'역시 이충희', '1분12초마다 한 골 넣는 남자', '묘기백출', '과연 득점기계', '잡았다하면 슛→골인', '그의 손엔 컴퓨터가 있는 것일까…'.

이충희가 활약하던 시절 신문 헤드라인을 몇 개 뽑아봤다. 요즘 프로농구에 이런 헤드라인을 연일 장식할 수 있는 한국인 농구선수가 과연 있을까?

고려대학교와 현대전자, 그리고 한국남자농구대표팀의 영원한 골게터로 활약한 이충희는 헤드라인에 언급된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렸던 선수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기록 뒤에는 이충희의 승부근성과 피나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농구인들은 이충희의 화려한 득점력을 논하기에 앞서, 최고의 슈터로 거듭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먼저 얘기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쉽게 득점을 올려댔던 그의 집중력과 슛 감각이 탄생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짓말이 아니고, 눈을 가려도 링이 보였다”고 했을 정도이니 어느 정도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충희의 득점 기록달성이 본격적으로 화제가 되기 시작한 건 농구대잔치 출범 이후였다. 그는 1985년 1월1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중앙대와의 준결승전에서 60점을 기록했다.

한때 심판구타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이충희는 자숙의 시간동안 슛 연습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돌아온 농구대잔치에서 동국대전에서 31득점, 경희대전에서 54점, 국민대전에서 43점, 기업은행전에서 40점 등 출전할 때마다 고득점을 올리면서 신기록 달성의 불꽃을 점화했다.

그 시즌 1차대회에서 그의 남긴 평균득점은 무려 41.4득점이었다. 이충희는 60점 기록 달성 후 “지난 번 경희대전에서는 상당히 많이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한 40점 정도 넣었다고 생각했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60점 기록은 2년만에 이충희 자신의 손에 의해 바뀌게 된다. 1987년 1월23일, 105-64로 승리한 경희대학교와의 경기에서 61득점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이날 경기 종료 36초전에 골밑슛을 성공시키면서 자기 기록을 경신했다. 이충희는 1월17일 경기에서 이미 59점을 올리는 등 득점력이 물에 이른 상태였는데, 1주일도 안 되어 새 기록을 올리게 됐다.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

 

그는 그 해 3월 필리핀 원정경기에서 자신의 최고 득점인 67점을 올렸고, 12월 17일, 명지대학교와의 농구대잔치 경기에서는 무려 64점을 터트렸다. 이 경기서 현대는 128점을 올려 농구대잔치 한 경기 최다득점을 남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언론은 이제 한 경기 최다득점이 아닌, 통산 최다득점 기록 달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충희는 농구협회가 농구대잔치 출범 4주년을 맞아 발표한 득점기록 부문에서 2,458점으로 단연 1위에 올라 있었다. 출전시간을 대입해 계산해보면 1분 12초마다 한 골을 올린 셈이었다.  

이충희는 1988년 12월 17일, 자신의 99번째 경기였던 기업은행전에서 전반 13분경에 골밑슛을 넣어 농구대잔치 사상 처음으로 3,000득점을 올렸다. 4,000점은 2년 뒤에 찾아왔는데, 그 과정은 아마 이충희 본인은 물론이고, 언론도 애가 탔을 것 같다. 대기록에 1점 남겨두고 시즌을 마쳤기 때문. 그는 1989년 농구대잔치 기아와의 결승에서 마지막 자유투 1구를 실패하면서 그 시즌을 3,999점으로 마쳤다. 그 아쉬움은 1990년 농구대잔치 개막전이었던 12월1일 상무전에서 풀 수 있었다. 4,000득점을 달성하던 날, 이충희는 "5천 득점도 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세월의 무게에 의해 이루지 못했다. 이충희는 무릎 및 장딴지 부상 후유증으로 예년과 같은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득점감각을 보여왔지만 끝내 5천 점 문턱은 넘지 못했다.

그는 4,393점이란 충분히 훌륭한  기록을 남기고 코트를 떠났다. 그의 마지막 대회였던 1991년, 그는 13경기에서 4.23점을 기록했다. 통산 평균 기록은 26.79점이었다. 은퇴 후 대만에 진출한 이충희는 대만리그 내 약체 중 하나였던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끄는가 하면, 적중률이 상상을 초월하는 외곽슛으로 대만 국민들을 매료시켰다. 그때 얻은 별명이 ‘신사수(神射手)’였다. 대만 스포츠 역사상 이름 앞에 신(神)자가 붙은 사람은 이충희가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글. 손대범 기자

이충희의 대표적인 득점 기록 (농구대잔치)

54점(1984년 12월15일, 경희대학교전)

60점(1985년 1월1일, 중앙대학교전)

45점(1986년 7월10일, 세계선수권 브라질전)* 

59점(1987년 1월17일, 기아산업전)

61점(1987년 1월23일, 경희대학교전)

*-역대 5위

 

이충희는…

한국 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충희는 1959년 11월 7일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송도중과 송도고를 거쳐 고려대학교로 진학해 49연승 신화를 이뤄내고 1981년부터 1992년까지 현대에서 뛰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국내선수 최초로 4천 득점 돌파를 하며 통산 4,412점을 기록하며 ‘신사수’, ‘슛도사’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1992년 은퇴 후 그는 대만 홍쿠오팀 선수 겸 감독을 거쳐 LG, 고려대, 동국대, 오리온스, DB 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탤런트 최란 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사진_문복주 기자,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기사제공 점프볼




서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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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1 0 9 2022.04.22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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